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녹산의 난 (문단 편집) === [[안녹산]] 거병 === [[천보]] 14'''재'''(년)[* 당현종은 천보 3년부터 '년'(年) 대신 '재'(載)를 쓰도록 했다.](755) 11월 10일 범양([[베이징]])에서 거병한 [[범양절도사]] 안녹산은 본거지에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, 150,000명의 대병력에 투항한 [[거란|거란족]] 및 [[해족]]의 기병 8,000여 명을 선봉에 내세워 남하를 시작했다. 안녹산의 휘하 부장이었던 평로병마사 [[사사명]] 및 최건우, 채희덕, 안사의, 하천년, 이일월 등 군사[* 각 군진의 담당자.]급 부장들 다수도 동조했다. 안녹산은 >'''[[간신]] [[양국충]]을 토벌하자''' 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거병했다. 사실 안녹산의 거병 시기 자체는 그렇게 영 좋지 않았다. 추운 겨울, 그것도 엄동설한이 시작되는 시점에 머나먼 동북방 범양에서 군대를 일으킨 것도 문제였지만 일단 '''안녹산의 아들 안경종'''이 [[태복|태복경]]에 임명되어 [[수도]]인 [[장안]]에 체류 중이라서 반란이 발생하면 처형될 것은 너무 뻔했다. 게다가 자신이 거병한 곳에서 장안까지의 거리가 상당했기 때문에 중간에 경유해야 할 곳의 지휘관을 포섭하는 절차가 필요했는데 이것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. 따라서,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킬 뜻은 있었으나 그 규모가 '[[당나라|당]]의 [[멸망]]과 안록산 왕조로의 대체'가 아니라 '''진짜로''' 양국충을 몰아내고 자기가 정권을 잡는 정도에 불과했으며, 양국충의 정치 공세에 더 이상 현직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황급히 반란을 결행한 [[최후의 발악]]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.[* 실제로 아들인 안경종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안녹산이 '''"[[적반하장|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아들을 죽인단 말인가!]]"'''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.] 그러나 안녹산은 천보 13재(754)부터 [[사병]]의 확충과 기존 군진 병력들의 환심을 사는 정책을 벌이며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,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 볼 여지도 많다. 실제로 천보 13재(754) 정월, 안녹산이 입조했을 때 그는 한구/군목등사+지총감사를 겸해, 전마와 다른 여러 마필의 확보에 분주했었으며, 2월에는 부하들에 대한 대규모 훈격을 허락해 줄 것을 허락받아 2,500여 명에 달하는 부하들에게 이를 베풀어 군심을 사기도 했다. 천보 14재(755) 2월에는 진내의 한장 32명을 번장으로 대체하겠다는, 무척이나 속보이는 요청을 하기도 했으며, 7월엔 말 3,000필, 번장 22명과 병사 6,000여 명을 경내로 보내 호종하겠다고 하기도 했다. 이런 주장을 한 것은 반란을 일으킬 때 길 안내 및 당나라 내부의 혼란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, 당현종이나 양국충도 이런 의도를 눈치챘다고 한다. 이런 기록들로 볼 때 안녹산의 거병은 확실히 준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. 그렇다면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실수를 왜 저질렀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, 후술하겠지만 전략적 식견이 부족하고 안목이 영 좋지 않았으므로 준비를 허술하게 한 것이었다. 거병 직후 [[평원]] [[태수]] 안진경(항복하지 않고 저항의사를 보였으나 서생으로 여기고 무시해 버렸다.), [[상산]] 태수 [[안고경]](위장 항복 이후 반란을 계획했다.) 등을 제외한 하북 전 지역이 일시에 항복했다.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어이없게도 양국충 토벌의 명분이 주변 관리들에게 먹힌 데다가, 현종의 밀명을 참칭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도 '''[[당현종]]이 [[친위 쿠데타]]를 통해 양국충을 제거한다고 착각'''했다는 것이다.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안녹산군은 정부군을 자처하면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급히 장안으로 향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. 덕분에 순식간에 광활한 [[하북]]을 획득한 안녹산군은 12월 2일, [[황하]]를 건너 영창, 박릉, 상산, 진류, 형양 등 [[중원]] 일대를 휩쓸며 동도 [[낙양]]으로 전진했다. 안녹산은 극히 소수의 병력을 점령지에 남기고 주력부대를 지휘, 낙양으로 접근했으며, 동시에 대동군사 고수암이 이끄는 일부 병력으로 길을 열고. 신임하는 부장인 사사명이 지휘하는 강력한 별동대로 [[태원]]을 노렸다. 이를 볼 때 안녹산의 전략상 목표는 단기간에 [[뤄양시|동경]](낙양), [[북경]](태원)을 장악하고 이 길을 통해 최종 목표인 수도 [[시안시|서경]](장안)을 함락하여, 당나라의 수도 및 준수도급 위상을 지닌 세 도시를 조기에 제압함과 동시에 황제를 사로잡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. 당제국은 건국 초부터 이 세 도시 및 인근 지역에 [[부(행정구역)|3부]], 즉 '경조부(장안), 하남부(낙양), 태원부(태원)'를 설치해 단순히 장안을 둘러싼 [[관중]]뿐만 아니라 이 지역까지 광범위하게 [[수도권]]으로 삼고 중시했으며, 따라서 당제국에 대한 어떤 반란 세력도 이 세 지역을 무시할 수 없었다. 장안과 낙양은 [[수나라|수]], 당이 이 두 도시를 오가며 [[천도]]를 거듭할 정도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도시였으며, 태원은 당왕조의 발상지이자 대 [[돌궐]](쾩튀르크) 전선의 사령부로써 다수의 군대와 관문이 위치한 매우 중요한 군사도시였기 때문이다. 또한 앞서 말했듯이 현종이나 양국충이 신속하게 반응하기 전에, 그리고 장안에 있는 아들 안경종이 처형당하기 전에 구해내려고 한 목적도 있었으므로 진격 속도가 신속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